토양으로서의 종이
나는 종이를 쓴다.
정확히 말하면, 안료와 수분이 내부로 스며들 수 있는 종이를 쓴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종이의 출신이 아니라 그 구조다. 그것은 습관이 아니고, 전통에 대한 답습도 아니다. 논리의 결과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항상 같은 질문을 던진다. 내가 만들려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담을 수 있는 재료는 무엇인가. 재료는 결과물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결과가 요구하는 조건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경험을 통해 축적된 판단의 범위 안에서 가능해진다. 같은 땅이라도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을 키워내듯 — 종이는 내 작업이 요구하는 바를 수용할 수 있는 기반이었다.
종이는 섬유 구조를 통해 색과 수분을 내부적으로 흡수하는 재료다. 그것이 종이를 평면이 아닌 입체로 만드는 근거다. 염색은 표면에 머물지 않고 섬유 깊이 침투하며, 어떤 공법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번짐의 속도와 방향이 달라진다. 뒷면에서 채색하는 배채기법은 앞면의 발색을 은근하게 조율하며, 전후면이 동시에 조형 구조로 작동하게 만든다. 앞과 뒤, 안과 밖이 함께 움직이는 재료 — 그것이 종이다. 같은 종이라도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재료가 된다.
내가 말하는 물성이란 재료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에 따라 선택되고 가공되는 조건이다. 나는 이것을 토양이라는 말로 정의한다. 토양은 씨앗을 고르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씨앗을 심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을 키워낸다. 종이도 그렇다. 종이 자체가 무언가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 종이는 그것을 키워낸다. 재료의 고유한 성질이 작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내적 논리가 재료의 물성을 가공하고 방향 짓는 것. 그 관계가 성립할 때 비로소 재료는 작업의 일부가 된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재료의 신비화에 동의하지 않는다. 어떤 재료를 썼는가, 그것을 다루는 데 얼마나 오랜 수련이 필요했는가 — 이것은 작업의 조형적 가치를 보증하지 않는다. 수련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재료를 신비화하는 근거가 아니라, 물성을 다룰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다. 고행의 서사는 감동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감동과 조형적 완성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검증될 수 없는 수련의 양은 결과물의 질을 담보하지 못한다. 재료의 희귀함이나 다루기 어려움은 작업의 내적 논리를 대신할 수 없다.
내가 진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다. 재료를 선택한 이유에 대한 내적 논리가 없는 것. "이 재료의 물성이 중요하다"는 선언은 주장일 뿐이다. 그 물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조형적 결과를 만들었는지, 관객에게 무엇을 전달했는지가 설명되지 않으면 그것은 선언에 머문다. 모호함 뒤에 숨는 것과 언어를 초월하는 것은 다르다. 재료는 수단이다. 그릇이 아무리 귀한 백자라도 담긴 것이 상해 있다면 실패한 그릇이다. 나에게 종이는 귀하기 때문에 쓰는 재료가 아니다. 내 사고를 가장 정확하게 가공할 수 있는 토양이기 때문에 쓰는 재료다.
내가 원하는 결과가 바뀌면 종이를 다루는 방식도 바뀐다. 염색의 농도가 달라지고, 번짐을 허용하는 범위가 달라지고, 배채의 깊이가 달라진다. 재료가 나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내 사고가 재료를 이끈다. 그 방향이 명확할 때 종이는 내가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키워낸다. 작업 방식은 그 사고의 경로를 따라 결정된다. 고정된 기법이 아니라, 매번 새롭게 가공되는 조건으로서의 방법론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바뀌면 재료도 바뀐다. 지금의 종이는 지금의 나에게 맞는 토양일 뿐이다.
20260330
Paper as Soil
I work with paper.
More precisely, I work with paper that allows pigment and moisture to absorb inward. What interests me is not the paper's origin, but its structure. This is not habit, nor a repetition of tradition. It is the result of logic. Before beginning any work, I always ask the same questions: What am I trying to make? And what material can hold it? The material must be capable of anticipating, to some degree, the conditions the outcome will require. That anticipation becomes possible within the range of judgment accumulated through experience. Just as the same ground grows entirely different things depending on what you plant — paper was the foundation capable of receiving what my work required.
Paper is a material that absorbs color and moisture inward through its fiber structure. This is what makes paper three-dimensional rather than flat. Dye does not remain on the surface; it penetrates deep into the fibers, and the speed and direction of its spread changes depending on the technique applied. Baechae — the practice of applying color from the back — quietly mediates the color that emerges on the front, making both sides function simultaneously as part of the compositional structure. A material in which front and back, inside and outside move together — that is paper. The same paper becomes an entirely different material depending on what I want from it.
What I mean by materiality is not the inherent property of a material, but a condition that is selected and shaped according to the artist's intention. I define this as soil. Soil does not choose its seeds. But depending on what is planted, it grows something entirely different. Paper works the same way. Paper itself makes no claims — it grows what I plant. It is not the material's inherent nature that determines the work, but the artist's internal logic that shapes and directs the material's properties. Only when that relationship holds does the material become part of the work.
For this reason, I do not subscribe to the mystification of materials. What material was used, how many years of discipline it required to handle — none of this guarantees the formal value of the work. Discipline matters. But it is not a basis for mystifying materials; it is the process of reaching a state in which one can handle materiality. The narrative of hardship can be moving. But being moved and achieving formal completion are two different things. An unverifiable amount of training cannot guarantee the quality of the result. The rarity of a material, or the difficulty of working with it, cannot substitute for the internal logic of the work.
The real problem, as I see it, is this: the absence of internal logic behind the choice of material. The declaration that "the materiality of this material matters" is nothing more than an assertion. If it cannot be explained what specific formal outcomes that materiality produced — what it communicated to the viewer — it remains only a declaration.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hiding behind ambiguity and transcending language. Material is a means. No matter how fine the porcelain, if what it holds has gone bad, it has failed as a vessel. I do not use paper because it is precious. I use it because it is the soil through which I can most precisely work out my thinking.
When the result I want changes, the way I handle paper changes. The density of the dye changes, the degree to which spreading is permitted changes, the depth of baechae changes. It is not the material that leads me — it is my thinking that leads the material. When that direction is clear, paper grows precisely what I want. The method of working is determined by the path of that thinking. Not a fixed technique, but a methodology understood as a condition that is newly shaped each time.
When what I want changes, the material changes too. The paper of the present is simply the soil that suits my present self.
30 March 2026
作为土壤的纸
我用纸。
更确切地说,我用的是能让颜料与水分向内渗透的纸。我关注的不是纸的产地,而是它的结构。这不是习惯,也不是对传统的因循。这是逻辑的结果。每次开始创作之前,我总是问自己同样的问题:我想做什么?什么材料能够承载它?材料必须能够预判结果所需的条件。这种预判,在经验积累而成的判断范围之内才得以实现。就如同一片土地,种下不同的种子便生长出截然不同的事物——纸,正是能够承接我的创作所需的基础。
纸通过纤维结构在内部吸收色彩与水分。这正是纸不只是平面,而是具有立体性的原因。染色不停留于表面,而是深入纤维,渗透的速度与方向随所用技法的不同而变化。从背面施色的背彩技法,微妙地调节正面的发色,使前后两面同时作为造型结构运作。前与后、内与外共同运动的材料——这就是纸。即便是同一张纸,因我所求不同,它便成为截然不同的材料。
我所说的物性,并非材料本身固有的性质,而是依据作者意图被选择与加工的条件。我将其定义为土壤。土壤不挑选种子。然而,种下什么,便生长出什么。纸亦如此。纸本身不主张任何东西,而是随我种下的内容生长出相应的结果。决定作品的不是材料的固有性质,而是作者的内在逻辑对材料物性的加工与引导。当这种关系成立时,材料才真正成为作品的一部分。
正因如此,我不认同对材料的神秘化。使用了什么材料,掌握它需要多少年的修炼——这些并不保证作品的造型价值。修炼固然重要。但它不是神秘化材料的依据,而是达到能够驾驭物性之状态的过程。苦行的叙事或许令人感动。然而,感动与造型完成度是两个不同维度的问题。无法被验证的修炼量,无法担保结果的质量。材料的稀有或难以驾驭,无法替代作品的内在逻辑。
我认为真正的问题在于此:缺乏选择材料的内在逻辑。"这种材料的物性很重要"这一宣言不过是一种主张。若无法说明这种物性具体产生了怎样的造型结果、向观者传达了什么,它便只停留于宣言。躲在模糊之后与超越语言,是两回事。材料是手段。器皿再珍贵,若其中盛放的东西已经腐坏,便是失败的器皿。我用纸,不是因为它珍贵,而是因为它是能够最精确地加工我的思考的土壤。
当我想要的结果改变时,处理纸的方式也随之改变。染色的浓度改变,允许渗透的范围改变,背彩的深度改变。引导我的不是材料,而是我的思考引导材料。当那个方向明确时,纸便精确地生长出我所想要的。创作方式沿着思考的路径而定。这不是固定的技法,而是每次重新加工的条件所构成的方法论。
当我所求改变时,材料也随之改变。如今的纸,不过是适合当下的我的土壤。
2026年3月30日
土壌としての紙
私は紙を用いる。
より正確に言えば、顔料と水分を内部へ浸透させることのできる紙を用いる。私が注目するのは紙の産地ではなく、その構造だ。それは習慣でもなく、伝統の踏襲でもない。論理の結果である。制作を始める前に、私はいつも同じ問いを立てる。自分が作ろうとしているものは何か。そして、それを受け止めることのできる素材は何か。素材は、結果が要求する条件をある程度予測できるものでなければならない。それは経験を通して蓄積された判断の範囲の中で可能になる。同じ土地でも、何を植えるかによってまったく異なるものが育つように——紙は、私の制作が求めるものを受け入れることのできる基盤だった。
紙は繊維構造を通じて色と水分を内部に吸収する素材である。それが紙を平面ではなく立体たらしめる根拠である。染料は表面にとどまらず、繊維の深部まで浸透し、どのような技法を用いるかによって、にじみの速度と方向が変化する。裏面から彩色する背彩技法は、表面の発色をひそかに調整し、前後両面が同時に造形構造として機能するようにする。表と裏、内と外がともに動く素材——それが紙である。同じ紙でも、私が何を求めるかによって、まったく異なる素材となる。
私が言う物性とは、素材それ自体の性質ではなく、作家の意図によって選択され、加工される条件のことである。私はこれを土壌という言葉で定義する。土壌は種を選ばない。しかし、何を植えるかによって、まったく異なるものを育てる。紙も同じである。紙自体が何かを主張するのではなく、私が何を植えるかによって、それを育てる。素材の固有の性質が作品を決定するのではなく、作家の内的論理が素材の物性を加工し、方向づける。その関係が成立したとき、はじめて素材は作品の一部となる。
このような理由から、私は素材の神秘化に同意しない。どのような素材を使ったか、それを扱うためにどれだけ長い修練が必要だったか——それは作品の造形的価値を保証するものではない。修練は重要である。しかし、それは素材を神秘化する根拠ではなく、物性を扱うことのできる状態へ到達するための過程である。苦行の物語は感動を与えることができる。しかし、感動と造形的完成は異なる次元の問題である。検証できない修練の量は、結果の質を保証しない。素材の希少性や扱いの難しさは、作品の内的論理の代わりにはなりえない。
私が本当の問題だと考えるのは、素材を選んだ理由についての内的論理が存在しないことである。「この素材の物性が重要だ」という宣言は、単なる主張にすぎない。その物性が具体的にどのような造形的結果を生み出したのか、観る者に何を伝えたのかが説明されなければ、それは宣言のままにとどまる。曖昧さの陰に隠れることと、言語を超越することは異なる。素材は手段である。どれほど貴重な白磁であっても、その中に入っているものが腐っていれば、それは失敗した器である。私にとって紙は、貴重だから使う素材ではない。自らの思考を最も正確に加工することのできる土壌だから使う素材なのである。
私が求める結果が変われば、紙の扱い方も変わる。染料の濃度が変わり、にじみを許容する範囲が変わり、背彩の深さも変わる。素材が私を導くのではなく、私の思考が素材を導く。その方向が明確なとき、紙は私が求めるものを正確に育てる。制作の方法は、その思考の経路に沿って決定される。固定された技法ではなく、その都度新たに加工される条件としての方法論である。
私が求めるものが変われば、素材も変わる。今の紙は、今の私にふさわしい土壌にすぎない。
2026年3月30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