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에 대해
초등 2학년 화창한 봄날의 주말, 여느 때처럼 동네 아이들과 장난질과 쌈박질의 경계를 넘나들며 뛰어놀고 있었다. 친구를 피해 계단을 급하게 오르던 중,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는 것과 동시에 가슴의 통증을 느끼며 의식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집안 소파에 누워 있었고, 걱정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부모님이 눈에 들어왔다.
그 일이 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원인을 찾기 위해 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다녔다. 손바닥은 사무용 A4 용지 같은 색깔처럼 핏기가 점점 사라졌고, 조금만 걸어도 숨이 콱 막혔다. 시간이 지날수록 증상은 잦아졌다. 3~4주 정도가 흘렀을까. 1989년 초여름으로 접어들 무렵, 대구 영대병원 복도의 통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지나 나와 어머니는 함께 의사 선생님 방으로 향했다. 정확한 병명은 기억이 안 나지만 심장에 혹이 발견돼서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눈물을 머금고 있는 어머니에게 내가 했던 첫마디가 “수술할 때 안 아파?”였다.
아버지의 인맥으로 수술 집도할 병원을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기고, 수술 준비에 들어갔다. 나중에 듣게 된 이야기인데, 1989년 당시에는 지금처럼 의료 기술이 좋지 않아서인지, 내 몸 상태가 안 좋아서인지 배를 갈라봐야 수술 가능 여부를 정확히 알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은 최악의 경우 그냥 죽는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일주일 정도 이름 모를 검사들을 진행했고, 하루 금식 후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다지 편하지 않은 침대에 누운 상태에서 투명한 마스크가 입에 씌워지며 잠이 들었다.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 없지만 의식이 돌아왔다. 중환자실이었는데, 아팠다. 그냥 아팠다. 수술 시간이 10시간을 넘었다고 했으니 아플 만했다. 산소마스크 같은 걸 끼고 있었는데 가래가 목을 막고 있었고, 쇄골 중간에서 명치까지 30cm 정도 되는 꿰맨 자국이 어렴풋이 보였다. 배꼽 위에는 투명한 고무호스 두 개가 몸속에 꽂혀 썩은 피 같은 걸 뿜어내고 있었다.
결국 마음이든 몸이든 시간이 약이었다. 의사 선생님께서 어린 나이라 꽤나 회복이 빠르다는 얘기를 많이 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회복 과정에서는 별문제 없이 예상한 날짜에 퇴원을 했다. 이때가 1989년, 9살, 초등 2학년 여름방학 두 달 동안 있었던 일이었다.
해가 바뀌고 아버지는 내 건강이 우려되었던 것일까. 그 많은 운동 중에 왜 하필 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를 산에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10살 어린 나이의 아이가 산에 오르는 걸 싫어할 법도 한데,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평소 조금만 걸어도 숨이 막혔던 호흡은 새벽안개 걷히듯 사라졌고,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때 들리는 말짱해진 심장 소리도 신기했다. 아마 초등 5학년 때까지는 매주 산에 다녔다.
태어나서 도시에서만 살아왔던 내게,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자연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아름답다기보다는 섬뜩하고 기괴했다. 멀쩡해 보이는 나뭇가지는 땅으로 곤두박질쳐져 있고,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는 능구렁이 같은 나무뿌리, 소형 자동차만 한 나무뿌리가 뽑힌 것도 모자라 하늘을 보고 드러누워 있었다. 짧게 내린 소낙비에 계곡물은 종잡을 수 없이 불어서 온 천지 폭포수가 되었고, 우의를 입고 비를 맞으며 구름 속을 걷는다는 것이 결코 몽환적이거나 서정적이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됐다. 해가 서쪽 봉우리로 숨을 때쯤에는 산짐승이 아닌 요괴들이 출몰할 법도 했다.
우물쭈물 학창 시절을 보내고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먹을 다루는 전공이다 보니 자연스레 수묵화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도서관에서 도록을 살피던 중 고전 회화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중국 북송대 산수화였는데 괴기스러운 기운을 가진 나무가 유독 눈에 거슬렸다. 아마 내가 봤던 그림이 ‘이성李成의 한강조정도寒江釣艇圖’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날 이후로 꽤나 자주 도서관을 들락거렸는데, 뭔가 마력 같은 매력에 북송대 그림이 끌렸다. 어릴 적 아버지와 산에 따라다니면서 보았던 기괴했던 장면이 오버랩된 듯했다. 정말이지 북송대 회화는 어릴 적 산에 오르며 보았던 장면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특히 나무가 그랬다.
한편으로 북송대 명화인 ‘조춘도’와 같은 명화를 모사해 보지 않고서는 나 스스로에게 화가의 자격을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꼭 넘어가야 할 거대한 산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 후로 북송대 회화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어떤 장르의 예술이든 앞으로 성장하기 위해 습득해야만 하는 기술적 문제가 수반된다고 생각했는데, 고전 수묵화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서예를 배워야 했다. 붓을 운영하는 능력이 없으면 좋은 필력을 기대할 수 없다고 믿었고, 경력이 깊어지면 자연스럽게 필력이 좋아질 거라는 주변 사람의 말은 믿지 않았다. 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바로 대구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석용진 선생님의 서실로 가서 서예를 시작했다. 학과 수업은 뒤로하고, 휴학 포함해서 꼬박 3년을 고대 명필가들의 서법을 익히는 데 모든 시간을 투자했다. 목표가 뚜렷했으니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대학 2학년(2001년) 때 대구 아문아트센터라는 곳에서 소산 박대성 선생님의 전시를 아주 감명 깊게 본 적이 있었다. 그 전시를 보고 “아…. 나중에 졸업을 하고 나면, 내 그림을 들고 꼭 찾아뵙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이제 막 졸업도 했으니 수소문 끝에 연락처를 알아내고, 대학교 때 했던 그림과 글씨를 가지고 박대성 선생님을 직접 찾아뵈었다.
소산 선생님 화실에서 대학교 때 작업했던 그림과 글씨를 보여 드렸는데, 첫 말씀이 “그림은 개판인데, 글씨는 잘 배웠네”였다. 그때 보여 드렸던 서예 작품이 안진경의 ‘쟁좌위첩’을 임서한 것인데, 내가 좀 미덥지 않으셨던지 눈앞에서 직접 글씨를 써 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그렇게 박대성 선생님의 호감을 얻고, 개자원화보(명말청초 시기 발행한 그림 교본)를 통해 산수화에 대한 기본기를 다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 순간 불현듯 북송대 대가들의 운필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서 붓이 시작해서 어떻게 맺음을 했는지 느껴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경기도 파주에 작업실을 달세로 10만 원에 빌려준다는 지인이 있어, 거처를 대구에서 아무 연고가 없는 파주로 옮겼다. 4점 정도의 북송 회화를 스스로 선정하고 본격적으로 작업에 임했다. 필획이 지나간 궤적들을 분석하고, 옛 그림이 만들어지는 조형의 작동 원리를 ‘해석’해 내는 것에 집중했다. 마치 고대 언어를 분해하여 직역하듯이, 옛 화가의 필법을 하나하나 모방하고 체득해 나가는 과정을 반복하였다.
창작의 고통은 모르겠으나, 모방의 고통은 생각보다 심했다.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배움을 얻을 처지도 아니었다. 오롯이 혼자 해결해 내야 했다. 또한 북쪽 파주의 겨울 날씨 또한 남쪽 지역과는 다른 종류의 추위였다. 1인용 전기장판 외에는 어떤 난방장치 없이 생활하였는데, 정말이지 활활 타오르는 연탄불을 통째로 얼려버릴 듯했다. 그래도 시간은 천천히 흘러흘러, 목련꽃이 만개할 무렵 대학 시절 그토록 도달하고 싶었던 북송대의 첫 번째 그림이 완성되어 있었다. 그 그림이 ‘방범관倣范寬 설경한림도雪景寒林圖’다.
그 후 임모 작업은 계속되었다. 북송대 회화뿐 아니라 중국 남송(倣李唐 萬壑松風圖 방이당 만학송풍도), 원, 명, 청 그리고 조선시대 회화와 도자기, 전통 문양, 중국 화상전畵像磚 등 동양 고전 회화를 총망라하여 살피는 작업을 진행했다.
어릴 적 경험인가. 아님 나도 언젠가는 거장이 되고자 하는 욕망인가. 나 스스로 정해 놓은 목표에 대한 압박감인가. 무엇이 나를 이토록 간절하게 만들었는지는 명확히 정의 내릴 수 없다는 것이 참으로 답답했다. 답을 찾을 수 없으니 내 몸이 반응하는 대로 맡길 수밖에 없었다.
30대 중반, 또래 작가들이 화단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을 때 흥미로운 일거리 하나가 들어왔다. SBS ‘사임당 빛의 일기’라는 드라마인데, 당시 대한민국 탑급 배우인 송승헌 씨와 이영애 씨가 주연을 맡은, 화가와 관련된 그림 드라마였다. 화면에 소품으로 등장할 그림들, 손 대역, 중간중간에 필요한 인서트 신 등, 얼떨결에 방송일을 시작했다. 일을 수락하고 나서 어리둥절했다. 대구에서 그다지 활동도 하지 않는 무명작가가 대한민국 탑급의 배우가 출연하는 드라마, 그것도 미술품 관련 드라마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한·중·일 동시 방영한다고 기대를 모으는 기사들이 마구 쏟아졌고, 부담감은 커져 갔다.
드라마 연출팀 입장에서도 내가 검증되지 않은 사람이라 직접 작업한 그림을 보여 달라는 요구를 해왔고, 2010년에 제작한 방몽유도원도倣安堅 夢遊桃源圖 그림을 직접 차에 싣고 강남 사무실로 찾아갔다. 제작진은 몽유도원도를 방倣한 그림을 보고 그제야 나를 믿어주는 눈치였다. 연출팀이 처음으로 요구했던 그림이 현동자 안견(15세기 화가)이 그렸다고 가정한 ‘금강산도’였다.
안견의 ‘금강산도’는 실존하지도, 그가 그렸다는 기록도 없다. 없는 작품을 실존하는 것처럼 창조해 내는 것이 눈앞에 닥친 과제였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금강산’을 ‘안견풍’으로 그려야 되는 상황이니 처음에는 여간 난감한 게 아니었다. 유일한 진작은 몽유도원도뿐이고, 전칭작(전해지는 작품)이 몇 점 존재했다. 드라마 대본 중에는 ‘곽희’라는 화가가 언급되는데, 이는 실제로 몽유도원도에 영향을 준 직접적인 북송 화가였다. 종합해 얘기하자면, ‘몽유도원도’와 안견의 전칭작, 안견 그림에 영향을 준 북송 시대 곽희의 그림, 인터넷상에서 떠도는 금강산 이미지를 수집하여 교집합을 찾아내기 위한 작업을 진행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이 15세기의 언어로 시를 짓는 작업이랄까. 덕분에 ‘창작의 고통’이라고는 말 못 하지만 ‘편집의 고통’은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또 하나, 드라마를 하면서 기억에 남는 그림이 하나 있다. 드라마의 대미를 장식할 그림을 요구했는데, 남녀(이영애, 송승헌) 주인공이 옆에 나란히 앉아 각자 그림을 그리고 CG를 통해 합쳐지는 신이었다. 대미를 장식한다는 조감독님의 말에 심적 부담감은 증폭되었다.
우선 그 시대에 있을 법한 그림이어야 했고, 금강산에서 사생을 하는 설정이니 드로잉 같은 현장감 있는 필선의 느낌이 필요해 보였다. 사임당이 살았던 시기가 1500년 전후이니까 그즈음 해서 참고할 만한 화가들의 자료를 살폈다. 한국 그림들은 관념산수가 대부분이라 중국 그림을 참고했다. 전체의 분위기는 명대明代의 느낌으로 가져가고, 필선의 느낌은 겸재, 바위와 수목 형태들은 내가 선호하고 좋아하는 고대 화가의 그림에서 가져와 편집하였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금강산을 1500년대풍의 형식으로 그려내는 것, 그림의 반반이 각기 다르면서도 합쳐졌을 때 아름다운 조형을 만들어 내야 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촬영이 끝난 후 그림의 제목은 흉중산수胸中山水로 이름 붙였다.
드라마 일을 하면서 말 못 할 다양한 에피소드가 있었고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1년 6개월가량의 프로젝트를 무탈하게 마무리 지었다. 유명 배우가 출연하는 드라마 제작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작가로서 주목받고, 이제 좀 유명해질 거라고 말해 주는 분들도 있었다. 허나 드라마 소품으로 등장한 그림으로 인해 작가로서 주목을 받고 유명해진다는 말은 우스운 얘기라 생각했다. 미디어에서 자신의 미술작품이 노출된다고 해서 개인의 작업적 성과가 높아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이전에는 상상해 보지 못했던 심적 부담과 압박을 잘 버텨냈고, ‘작가’로서가 아닌 드라마 제작의 ‘팀원’으로서의 역할을 잘해 내었다는 것에 만족했다. 덕분에 이후로도 다양한 드라마와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하게 되었다. 물론 작가로서 필요한 자유로운 조형의 세계, 그리고 무한한 상상력을 위해 고전을 탐독하는 작업도 꾸준히 이어나갔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20대 초반 서예를 선택한 것은 너무 잘한 일이라 생각된다. 졸업 후 다사다난한 20대 후반, 그토록 원했던 북송 산수를 나 스스로 만족할 만큼의 결과로 그려 내었다. 물론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기법적인 면과 제작 과정이 아쉽긴 하나,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않겠는가. “옛날 그림이나 베껴내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라는 비아냥도 심심찮게 들었다. 하지만 어제의 것을 모방하는 것이나, 천 년 전의 것을 모방하는 것이나 본질은 같다고 생각했다. 동시대 미술 또는 현대미술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지 내가 쫓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믿었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새로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동력을 끊임없이 스스로 생산할 수 있느냐였고, 그러자면 조금이라도 젊을 때 경험의 스펙트럼을 넓혀 놓아야 할 것만 같았다. 그 경험적 측면을 고전 속에서 구했다. 20대 초반, 운명같이 고전 수묵화에 대해 뭔가 알 수 없는 매력을 느꼈고, 나 스스로 무엇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했을 뿐이다. 천년, 아니 그 이상의 생명력을 지녀온 선배들의 예술작품을 눈으로만 보고 지나가기엔 너무 아쉬웠다.
종종 “왜 고전 산수화를 모사하기 시작했나?”고 물어온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참 난감하다. 보통은 유년 시절의 경험이 크게 작용한 듯하다고 답을 하지만, 유년 시절의 경험이 없었다 한들 뭐 크게 달라졌을까. 모를 일이다.
40대 중반,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명확히 정의 내릴 수는 없으나, 꽤나 오랫동안 고전을 탐독해 왔다. 2002년 서예를 시작했고, 2020년 곽희郭熙의 한림도寒林圖를 끝으로 스스로 설정해 놓은 ‘고전의 탐독’은 끝을 냈다. 한림도에 전각을 찍으면서 “이만하면 됐다”라는 생각과 함께 18년 동안의 챕터 하나가 순식간에 넘어가 버렸다. 그냥 자연스럽게 시기가 도래한 것일까. 내 양심이 허락해 준 걸까. 이제 자신의 길을 가보라고...
명말 청초의 화가 석도(石濤, 1642년~1707년)의 「석도화론」 변화장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만약 내 그림이 그놈의 대가들의 그림을 꼭 닮았다고 하자! 그래봤자 그것은 그놈의 대가들이 먹고 난 찌꺼기 국물을 들이키는 꼴이니, 도대체 이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도 알고 있다. 그것이 찌꺼기라는 것을. 하지만 의미는 내가 부여하기 나름이다. 내게 고전은 인식의 도구이자 참고의 기준이었다. 나는 항상 생각한다. ‘모방, 변형, 창조’의 과정에서 지금 어디쯤 걸어가고 있을까. 참으로 그것이 궁금하다.
2024. 4. 25.
On the Origin
One bright spring weekend when I was in the second grade of elementary school, I was running around with the neighborhood kids as usual, somewhere between play and fighting. While rushing up the stairs to avoid a friend, I suddenly felt unable to breathe. At the same time, a sharp pain struck my chest and I lost consciousness. When I opened my eyes, I was lying on the sofa at home, and the first thing I saw were my parents looking down at me with deep concern.
After that incident, I visited the hospital almost every other day to undergo tests in search of the cause. The color gradually drained from my palms until they looked like sheets of office A4 paper. Even a short walk would leave me breathless. As time passed, the symptoms became more frequent. Three or four weeks went by. In early summer of 1989, my mother and I walked down the corridor of Yeungnam University Hospital in Daegu, sunlight pouring through the large windows. The doctor told us that a mass had been found in my heart and that I needed immediate surgery. The first thing I asked my mother, who was holding back tears, was simply: “Will it hurt during the operation?”
Through my father’s connections, the surgery was moved to Severance Hospital in Sinchon, and preparations began. Later I was told that in 1989 medical technology was not as advanced as it is today, and that the doctors would only know whether surgery was truly possible after opening my body. In other words, in the worst case, I might simply die. For about a week I underwent numerous tests whose names I never learned. After fasting for a day, I was taken into the operating room. Lying on an uncomfortable bed, a transparent mask was placed over my mouth, and I drifted into sleep.
I do not know how many days passed before I regained consciousness. I was in the intensive care unit. It hurt. It simply hurt. The surgery had taken more than ten hours, so perhaps the pain was inevitable. I was wearing something like an oxygen mask, and phlegm clogged my throat. I could vaguely see a stitched scar running about thirty centimeters from the middle of my collarbone down to the pit of my stomach. Above my navel, two transparent tubes were inserted into my body, draining something like dark, rotten blood.
In the end, time healed both body and mind. I remember the doctors saying that because I was young, my recovery was surprisingly fast. The recovery process went smoothly, and I was discharged on the expected date. All of this happened during the two months of summer vacation when I was nine years old, in the second grade of elementary school in 1989.
The following year, perhaps worried about my health, my father began taking me hiking. Out of all possible exercises, I still do not know why he chose mountains. A ten-year-old child might have hated climbing mountains, but strangely I did not dislike it. The breathlessness that used to seize me even during short walks disappeared like morning fog lifting at dawn. When my breath rose to my throat, I could hear my heart beating clearly, and it felt almost miraculous. Until around the fifth grade of elementary school, we went to the mountains nearly every week.
Having lived only in the city since birth, the sight of untouched nature shocked me. It was less beautiful than it was eerie and grotesque. Branches that looked perfectly healthy had collapsed into the ground. Roots twisted like snakes burst out from places I could not imagine. Massive roots, the size of small cars, had been torn from the earth and lay exposed to the sky. After a brief downpour, streams would swell uncontrollably and the entire valley turned into waterfalls. Walking through clouds in the rain wearing a poncho was far from dreamy or poetic. When the sun began to sink behind the western ridge, it felt as if not animals but strange spirits might appear.
After drifting somewhat aimlessly through my school years, I eventually entered an art university. Because my major involved working with ink, I naturally became interested in ink painting. One day, while browsing through exhibition catalogs in the library, a classical painting caught my eye. It was a Northern Song dynasty landscape from China. There was something unsettling about the trees in the painting that particularly struck me. If I remember correctly, the work was Fishing Boat on a Cold River by Li Cheng. From that day on, I began visiting the library quite often. Northern Song paintings had a strange magnetic attraction. They seemed to overlap with the strange scenes I had witnessed while hiking with my father as a child. Indeed, the landscapes of the Northern Song dynasty looked astonishingly similar to what I had seen in the mountains during my childhood—especially the trees.
At the same time, I felt that unless I attempted to copy a masterpiece such as Early Spring, I could not grant myself the qualification of being a painter. It became a great mountain range that I knew I would have to cross someday. From that point on, I began to study Northern Song painting.
I believed that any artistic discipline requires the acquisition of technical skills in order to grow. To approach classical ink painting, I realized I had to study calligraphy. Without the ability to control the brush, one cannot expect to develop strong brushwork. I did not believe the common saying that brush skill naturally improves with time. As soon as I reached this conclusion, I went to the calligraphy studio of Master Seok Yong-jin in Daegu and began studying calligraphy. I set aside my university courses and devoted three full years—including a leave of absence—to studying the brush methods of ancient calligraphic masters. My goal was clear, and nothing else caught my attention.
In my second year of university (2001), I saw an exhibition by the painter Park Dae-sung at Amun Art Center in Daegu that left a deep impression on me. After seeing that exhibition, I thought to myself, “Someday, after I graduate, I want to bring my paintings and meet him.” Once I graduated, I managed to obtain his contact information and went to visit him with the paintings and calligraphy I had produced during university.
When I showed him my works in his studio, his first comment was: “Your paintings are a mess, but you learned your calligraphy well.” The calligraphy I had shown him was a copy of Yan Zhenqing’s Zheng Zuo Wei Tie. Perhaps he did not fully trust me, because he asked me to write something directly in front of him. In any case, after gaining his approval, I began to build my foundation in landscape painting through the Mustard Seed Garden Painting Manual.
Time passed. At some point, I suddenly began to see the brush movements of the Northern Song masters. I could sense where the brush began and how it ended. Around that time, a friend told me that I could rent a studio in Paju for only 100,000 won a month. I moved from Daegu to Paju, a place where I had no connections. I selected about four Northern Song paintings and began working seriously. I focused on analyzing the traces of brushstrokes and interpreting the structural mechanisms that produced those ancient images. Like breaking down an ancient language and translating it literally, I repeatedly imitated and internalized the brush methods of the old masters.
I do not know the pain of creation, but the pain of imitation was far greater than I had expected. There was no one I could ask, and no teacher from whom I could learn. I had to resolve everything alone. The winter in Paju was also a different kind of cold compared to the south. I lived with nothing but a small electric heating mat. The cold felt as though it could freeze a burning coal briquette solid. Yet time passed slowly, and when the magnolia blossoms began to bloom, the first Northern Song painting I had long dreamed of reaching was finally completed: Snowy Forest in the Manner of Fan Kuan.
After that, the work of copying continued. I studied not only Northern Song paintings but also works from the Southern Song, Yuan, Ming, and Qing dynasties, as well as Joseon paintings, ceramics, traditional patterns, and Chinese portrait bricks. In short, I immersed myself in the entire spectrum of East Asian classical art.
Was it my childhood experiences? Or perhaps a desire to become a master myself someday? Or the pressure of the goals I had set for myself? I found it frustrating that I could not clearly define what made me pursue this path so desperately. Unable to find an answer, I simply allowed my body to respond as it wished.
In my mid-thirties, when artists of my generation were actively participating in the art world, an unexpected opportunity arrived. It was a television drama titled Saimdang, Light’s Diary produced by SBS, starring top Korean actors Song Seung-heon and Lee Young-ae. It was a drama centered on paintings and painters. I unexpectedly became involved in television production—creating prop paintings for the screen, serving as a hand double, and producing insert shots. I was bewildered. An unknown painter from Daegu, who was not even very active locally, was suddenly participating in a drama starring major actors. News articles spoke of the drama being broadcast simultaneously in Korea, China, and Japan, and the pressure gradually grew.
Eventually, I completed the one-and-a-half-year project. Some people said that participating in a drama with famous actors would bring attention and make me well known as an artist. But I thought that was a ridiculous idea. Appearing as a prop in a television drama does not elevate the artistic achievement of a painter. I was simply satisfied that I had endured the pressure and fulfilled my role—not as an artist, but as a member of the production team.
Looking back now, choosing calligraphy in my early twenties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In my late twenties, after graduation, I was finally able to produce Northern Song landscapes that satisfied me. Some people mocked me, saying, “What’s the point of copying old paintings?” But to me, copying something from yesterday and copying something from a thousand years ago are essentially the same. Contemporary art is simply a phenomenon happening in the present; it was never the object I felt compelled to pursue. What mattered was whether I could continue to generate the energy needed to create something new. And to do that, I believed I had to expand the spectrum of my experiences while I was still young. I sought that experience within the classics.
People sometimes ask me why I began copying classical landscapes. Each time I find the question difficult to answer. Usually I say that childhood experiences played a major role. But even if those experiences had not existed, would things have been very different? I do not know.
Now, in my mid-forties, I cannot clearly explain how I arrived here, but I realize that I have spent a very long time studying the classics. I began calligraphy in 2002, and with my copy of Guo Xi’s Cold Forest in 2020, I concluded the chapter I had set for myself as “the study of the classics.” When I stamped the seal on that painting, I felt simply: “This is enough.” An eighteen-year chapter suddenly came to an end.
Perhaps the time had simply arrived. Perhaps my conscience allowed it.
Now it was time to walk my own path.
The Ming–Qing painter Shitao wrote in his Treatise on Painting:
“If my paintings resemble those of the old masters, then I am merely drinking the leftover soup after they have eaten. What meaning could that possibly have for me?”
I know that it is leftovers. But meaning is something I assign myself. For me, the classics were a tool of perception and a reference point. I often wonder where I stand now within the process of imitation, transformation, and creation.
I remain deeply curious about that.
April 25, 2024
关于根源
小学二年级一个晴朗的春日周末,我像往常一样和邻居的小伙伴们一起奔跑打闹,在玩耍与打架之间来回穿梭。为了躲避朋友,我急忙跑上楼梯,突然之间呼吸变得困难,同时胸口传来剧烈的疼痛,随后便失去了意识。等我再次睁开眼时,已经躺在家里的沙发上,首先映入眼帘的是父母那充满担忧的目光。
那件事之后,为了寻找原因,我几乎隔一天就要去医院做检查。手掌的颜色逐渐变得像办公用的A4纸一样苍白,稍微走一段路就会感到呼吸堵塞。随着时间的推移,症状越来越频繁。大约过了三四周。1989年初夏将至的某一天,阳光从大邱岭南大学医院走廊的大窗户照进来,我和母亲一起走向医生的诊室。具体的病名我已经记不清了,只记得医生说在心脏里发现了肿块,必须马上进行手术。面对眼含泪水的母亲,我说的第一句话是:“手术的时候会疼吗?”
通过父亲的人脉,手术医院转到了首尔新村的延世大学附属塞弗兰斯医院,并开始准备手术。后来听说,在1989年当时,或许是因为医疗技术不像现在这样发达,又或者是因为我的身体状况不好,必须先把腹腔打开,才能确定是否能够进行手术。这句话在最坏的情况下,大概意味着我可能就此死去。之后进行了大约一周各种不知名的检查,在禁食一天之后,我被推进了手术室。躺在一张并不舒适的病床上,一个透明的面罩罩在脸上,我很快就睡着了。
不知道过了多少天,我恢复了意识。那是在重症监护室,很疼。只是疼。手术时间超过了十个小时,疼也是理所当然的事情。我戴着类似氧气面罩的东西,痰堵在喉咙里,从锁骨中间到胃口的位置,有一条大约三十厘米长的缝合伤口隐约可见。在肚脐上方插着两根透明的橡胶管,从身体里排出像腐败血液一样的东西。
最终,无论是身体还是心境,时间都是最好的药。我记得医生曾多次说,因为我还年幼,所以恢复得相当快。在恢复过程中并没有出现特别的问题,我按预期的时间顺利出院。那是1989年,我九岁,小学二年级,那整个夏季的两个月里发生的事情。
第二年开始,也许是父亲担心我的健康。在那么多运动当中,为什么偏偏选择爬山,我并不清楚,但他开始带我去登山。一个十岁的孩子按理说应该会讨厌爬山,但我并没有特别排斥。原本稍微走几步就会感到窒息的呼吸,像清晨的雾气一样逐渐消散。当呼吸变得急促时,听见自己变得有力的心跳声,也让我感到十分神奇。大概一直到小学五年级,我几乎每周都会去爬山。
从出生起一直生活在城市里的我,第一次看到没有人类痕迹的自然景象时,感到非常震撼。与其说是美丽,不如说是诡异而令人不安。看起来完好的树枝却突然向地面坠落,像蛇一样从地面钻出来的树根,还有像小型汽车一样巨大的树根被连根拔起,仰面朝天倒在那里。一阵短暂的骤雨之后,溪流瞬间暴涨,整片山谷仿佛变成了无数瀑布。我也逐渐明白,穿着雨衣在雨中行走在云雾里的体验,并不像想象中那样梦幻或诗意。当夕阳躲到西边山峰之后,我甚至觉得山里出现的或许不是野兽,而是妖怪。
就这样浑浑噩噩地度过了学生时代,我进入了美术大学。因为学习的是与墨有关的专业,自然而然地对水墨画产生了兴趣。有一天,我偶然在图书馆翻阅画册时,一幅古代绘画吸引了我的目光。那是一幅中国北宋时期的山水画,其中一棵带着怪异气息的树特别刺眼。我记得那幅画应该是李成的《寒江钓艇图》。从那天开始,我频繁地出入图书馆,不知为何,北宋时期的绘画似乎有一种魔力般吸引着我。那仿佛与我童年时跟随父亲登山时看到的那些诡异景象产生了重叠。北宋山水画与我童年在山中看到的景象是如此相似,尤其是那些树。
另一方面,如果没有尝试临摹像《早春图》这样的北宋名作,我似乎无法给予自己作为画家的资格。因此,它逐渐成为我必须跨越的一座巨大山脉。从那之后,我开始深入研究北宋绘画。
我一直认为,无论哪一种艺术门类,要继续成长都必须掌握相应的技术问题。而要接近古典水墨画,就必须学习书法。我相信如果没有驾驭毛笔的能力,就不可能拥有良好的笔力,也不相信所谓随着资历增长笔力自然会变好的说法。一旦有了这样的想法,我立刻前往在大邱活动的石龙镇先生的书室开始学习书法。我几乎把大学课程抛在一边,包括休学在内整整三年,把所有时间都投入到古代名家的书法训练之中。因为目标非常明确,其余的一切都无法进入我的视线。
大学二年级(2001年)时,我曾在大邱阿门艺术中心观看过小山朴大成先生的展览,那次展览给我留下了极其深刻的印象。当时我想:“等将来毕业之后,一定要带着自己的画去拜访这位老师。”后来毕业不久,我四处打听终于找到了他的联系方式,带着大学时期画的画和写的字亲自前去拜访。
在小山先生的画室里,我给他看了大学时期的作品。他的第一句话是:“画画得一塌糊涂,不过字倒是学得不错。”当时我给他看的书法作品是临写颜真卿的《争座位帖》。或许他对我还有些怀疑,便让我当场写字给他看。无论如何,我因此获得了朴大成先生的认可,并通过《芥子园画谱》开始系统地打下山水画的基础。
不知道过了多久,有一天我突然开始看见北宋大师们的运笔方式。我仿佛能感觉到笔从哪里开始,又在哪里结束。正好有一位朋友说,在京畿道坡州可以以每月十万韩元租到一间工作室,于是我离开大邱,搬到了毫无关系的坡州。我自己挑选了四幅北宋绘画,开始正式投入创作。我专注于分析笔画经过的轨迹,并试图“解读”古代绘画形成的造型机制。就像拆解古代语言并逐字翻译一样,我不断重复模仿与体悟古代画家的笔法。
我不知道创作的痛苦是什么样,但模仿的痛苦却远远超出想象。我既无法向任何人请教,也没有学习的环境,只能完全依靠自己解决。坡州北方的冬天也比南方更加寒冷。我几乎没有任何取暖设备,只有一张单人电热毯。那寒冷仿佛能把熊熊燃烧的煤球火整个冻结。时间缓慢流逝,当玉兰花盛开的时候,我大学时期一直想要抵达的北宋绘画终于完成了第一件作品,那就是《倣范宽 雪景寒林图》。
之后临摹的工作仍然继续。我不仅研究北宋绘画,还广泛涉猎中国南宋、元、明、清以及朝鲜时代的绘画、陶瓷、传统纹样、中国画像砖等东方古典艺术。
也许是童年的经历,又或者是我内心某种想成为大师的欲望,又或许是我给自己设定的目标所带来的压力。究竟是什么让我如此执着,我始终无法给出明确的答案。找不到答案,我只能任由自己的身体去回应。
三十多岁中期,当同龄的艺术家们在画坛上活跃地活动时,一件有趣的工作突然找上门来。那是一部名为《师任堂:光的日记》的SBS电视剧,由韩国顶级演员宋承宪和李英爱主演,是一部与画家相关的电视剧。我负责为剧中提供作为道具出现的绘画作品、手部替身以及一些插入镜头。就这样,我稀里糊涂地开始参与电视制作的工作。
在答应这份工作之后,我一度感到有些茫然。因为像我这样一个在大邱几乎没有什么活动、默默无闻的画家,竟然能够参与到由韩国顶级演员主演的电视剧制作之中,而且还是一部与美术作品相关的电视剧。媒体上不断出现关于这部剧将在韩国、中国、日本同步播出的报道,压力也随之越来越大。
制作团队也担心我并未经过验证,因此要求我展示自己实际创作的作品。于是我把2010年创作的《倣安坚 梦游桃源图》装进车里,亲自带到江南的制作公司办公室。当制作人员看到这幅仿作之后,才似乎开始相信我的能力。导演组最初提出的任务,是创作一幅假设由15世纪画家安坚所绘的《金刚山图》。
然而安坚的《金刚山图》并不存在,也没有任何记录表明他曾画过这幅画。我的任务,就是要把一件不存在的作品创造得仿佛真实存在一般。我从未去过金刚山,却要以“安坚风格”来描绘它,这在一开始让我感到十分为难。安坚唯一确定的真迹只有《梦游桃源图》,另外还有几件传称作品。电视剧剧本中提到了北宋画家郭熙,而他正是对《梦游桃源图》产生过直接影响的画家。综合这些线索,我开始收集《梦游桃源图》、安坚的传称作品、影响安坚的北宋画家郭熙的作品,以及互联网上流传的金刚山照片,并试图在这些材料之间寻找交集。就像一个生活在21世纪的人,用15世纪的语言写诗一样。也正因为如此,我虽然不能说真正体验了“创作的痛苦”,却深刻体会到了“编辑的痛苦”。
在电视剧制作过程中,还有一幅画让我印象尤为深刻。导演组希望我创作一幅作为剧情高潮出现的画面。那一幕是男女主角(李英爱、宋承宪)并排坐在一起,各自作画,然后通过CG合成为一幅完整的画。听到这是“结尾高潮”的画面,我的心理压力更大了。
首先,这幅画必须看起来像是那个时代可能存在的作品;同时剧情设定是在金刚山进行写生,因此需要一种带有现场感的笔触。师任堂生活在1500年前后,于是我查阅了那个时代前后的画家资料。由于韩国绘画多为观念山水,因此我更多参考了中国绘画。整体气氛借鉴明代绘画的风格,笔线的感觉则参考谦斋郑敾,而岩石和树木的形态则从我所喜爱的古代画家作品中提取并重新组合。要以16世纪风格描绘一个我从未见过的金刚山,并且让两幅各自不同的画在合并之后形成美丽的构图,这并不是一件容易的事情。拍摄结束之后,我为这幅画取名为《胸中山水》。
在参与电视剧制作的过程中,经历了许多难以言说的故事与波折,但这项持续了一年半的项目最终顺利完成。有人认为,因为参与了由著名演员出演的电视剧制作,我作为画家会因此受到关注,甚至可能因此变得有名。但在我看来,仅仅因为一幅出现在电视剧中的道具画而获得关注并变得有名,这种说法实在有些可笑。艺术作品在媒体中的曝光,并不会自动提高一个艺术家的创作成就。对我来说,这段经历的意义只是让我承受住了以前从未想象过的心理压力,并作为电视剧制作团队的一员完成了自己的工作。之后我也陆续参与了一些电视剧与纪录片的制作。当然,为了作为画家所需要的自由造型世界与无限想象力,我依然持续不断地阅读和研究古典绘画。
现在回想起来,在二十岁出头时选择学习书法,是一件非常正确的事情。大学毕业之后,在充满波折的二十多岁后期,我终于画出了自己满意的北宋山水。当然现在回头看,在技术层面与制作过程上仍然存在一些遗憾。但正如俗话所说,不管走哪条路,只要最终到达北京就好。有人时常嘲讽地说:“整天临摹古画有什么意义?”但在我看来,无论是模仿昨天的作品,还是模仿一千年前的作品,本质上并没有什么不同。我始终认为,当代艺术或现代艺术只是当下正在发生的现象,并不是我必须追逐的对象。真正重要的是,自己是否能够不断产生创造新事物的动力。因此我觉得,在年轻的时候尽量拓宽经验的光谱是非常重要的。而我正是在古典艺术之中寻找这种经验。二十岁出头时,我仿佛命运一般地被古典水墨画吸引,并主动选择了自己愿意接受影响的对象。那些拥有千年甚至更长生命力的前辈艺术作品,如果只是看一眼就匆匆离开,未免太可惜了。
人们经常问我:“为什么开始临摹古典山水画?”每当听到这样的问题,我总是感到有些为难。通常我会回答,童年的经历似乎起到了很大的作用。但如果没有那些童年的经历,事情真的会完全不同吗?也许谁也不知道。
如今已是四十多岁。虽然我无法明确地说明自己是如何一路走到这里的,但我确实长时间沉浸在古典艺术之中。2002年开始学习书法,到了2020年,在完成郭熙的《寒林图》之后,我也为自己设定的“古典研读”画上了句号。当我在《寒林图》上盖下印章时,突然觉得“这样已经足够了”。十八年的一个章节,就这样在一瞬间翻了过去。也许只是时间自然地到来了,也许是我的良心终于允许我继续前行。 仿佛在说:现在去走你自己的道路吧。
明末清初的画家石涛(1642–1707)在《石涛画论》“变化章”中写过这样一句话:
“假如我的画真的与那些大师的画一模一样,那不过是喝他们吃剩下的残羹而已,这对我来说又有什么意义呢?”
我也知道,那确实只是残羹。但意义如何,终究取决于我自己赋予它什么意义。对我来说,古典是认知的工具,也是参照的标准。我常常思考:在“模仿、变形、创造”的过程中,我现在究竟走到了哪里。对此,我始终充满好奇。
2024年4月25日
根源について
小学二年生のある晴れた春の日の週末、私はいつものように近所の子どもたちと走り回り、いたずらとけんかの境目を行き来しながら遊んでいた。友だちから逃げようとして階段を急いで駆け上がったその瞬間、突然息ができなくなり、同時に胸の痛みを感じて意識を失った。気がつくと家のソファに横たわっており、心配そうな表情で私を見つめている両親の姿が目に入った。
その出来事のあと、原因を突き止めるために、ほとんど一日おきに病院へ検査に通うことになった。手のひらの色は事務用のA4用紙のように次第に血の気が失われ、少し歩いただけでも息が詰まるようになった。時間が経つにつれて症状はますます頻繁に現れた。三、四週間ほどが過ぎただろうか。1989年初夏に差しかかる頃、大邱の嶺南大学病院の廊下にある大きな窓から差し込む陽射しの中を通り抜け、私は母とともに医師の診察室へ向かった。正確な病名は覚えていないが、心臓に腫瘍のようなものが見つかり、すぐに手術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われた。涙をこらえている母に向かって、私が最初に言った言葉は「手術って痛くないの?」だった。
父のつてを頼って、手術を行う病院は新村のセブランス病院に移され、手術の準備が始まった。後になって聞いた話だが、1989年当時は今ほど医療技術が進んでいなかったためか、あるいは私の体の状態が良くなかったためか、腹部を開いてみなければ手術が可能かどうか分からないと言われていたらしい。それは最悪の場合、そのまま命を落とす可能性があるという意味だったのだろう。約一週間にわたり名前も分からないさまざまな検査が行われ、前日に絶食をしてから手術室へ入った。あまり快適とは言えないベッドに横たわり、透明なマスクが口に当てられると、そのまま眠りに落ちた。
何日が過ぎたのか分からないが、意識が戻った。そこは集中治療室だった。痛かった。ただ痛かった。手術時間は十時間を超えていたと聞いたから、痛いのも当然だった。酸素マスクのようなものをつけていたが、痰が喉を塞いでいた。鎖骨の中央からみぞおちにかけて、三十センチほどの縫合跡がぼんやりと見えた。へその上には透明なゴムホースが二本差し込まれており、腐った血のような液体が体の外へ流れ出ていた。
結局のところ、心であれ体であれ、時間こそが最良の薬だった。医師は、まだ幼かったため回復がかなり早いと言っていたのを覚えている。回復の過程では特に問題もなく、予定された日に退院することができた。それは1989年、私が九歳、小学二年生の夏休みの二か月のあいだに起こった出来事だった。
翌年になると、父は私の健康を心配していたのだろう。数ある運動の中でなぜ山だったのかは分からないが、父は私を山へ連れて行くようになった。十歳の子どもなら山登りを嫌がっても不思議ではないが、私はそれほど嫌ではなかった。少し歩いただけでも息が詰まっていた呼吸は、まるで朝霧が晴れていくように消えていった。息が喉元まで上がってくるときに聞こえる、力強くなった自分の心臓の鼓動も不思議に感じられた。おそらく小学五年生になる頃までは、毎週のように山へ通っていたと思う。
生まれてからずっと都市で暮らしてきた私にとって、人の手の入っていない自然の姿は衝撃的だった。美しいというよりも、むしろ不気味で奇妙だった。何事もなさそうに見える木の枝が突然地面へ折れ落ちていたり、どこから伸びてきたのか分からない蛇のような木の根が地面を這っていたり、さらには小型の自動車ほどもある巨大な根が引き抜かれて空を向いて倒れていたりした。短い夕立が降るだけで谷の水は一気に増水し、あたり一面が滝のようになった。雨具を着て雨の中を歩き、雲の中を進む体験は、決して幻想的でも叙情的でもないということも知った。太陽が西の峰の向こうへ沈む頃になると、山には獣ではなく妖怪が現れてもおかしくないように思えた。
そんなふうにして、どこかぼんやりと学生時代を過ごし、私は美術大学に進学した。墨を扱う専攻だったため、自然と水墨画に関心を持つようになった。ある日、図書館で画集をめくっていたとき、一枚の古典絵画が目に留まった。中国北宋時代の山水画だったが、その中に描かれた奇妙な気配を帯びた木が特に印象に残った。おそらく私が見たのは李成の《寒江釣艇図》だったと思う。その日以来、私は何度も図書館に足を運ぶようになった。不思議なことに、北宋の絵画には魔力のような魅力があり、強く惹きつけられた。幼い頃、父とともに山を歩いたときに見たあの奇妙な光景が重なって見えたからだ。北宋の山水画は、子どもの頃に山で見た景色と驚くほど似ていた。特に木がそうだった。
一方で、《早春図》のような北宋の名画を実際に臨模してみなければ、自分自身に画家としての資格を与えることはできないのではないか、という思いもあった。そしてそれは、いつか必ず越えなければならない巨大な山脈のような存在になっていった。こうして私は北宋絵画の研究を始めることになった。
どのような芸術の分野であれ、成長していくためには必ず習得すべき技術的な問題が伴うものだと私は考えていた。古典水墨画に近づくためには、書道を学ぶ必要があった。筆を運ぶ能力がなければ優れた筆力は期待できないと信じていたし、経験を積めば自然と筆力が良くなるという周囲の言葉も信じなかった。そう考えた私はすぐに、大邱で活動していた石龍鎮先生の書室を訪ね、書道を始めた。大学の授業は後回しにし、休学も含めて三年間、古代の名書家たちの書法を学ぶことにすべての時間を費やした。目標がはっきりしていたため、他のことはほとんど目に入らなかった。
大学二年生(2001年)のとき、大邱のアムンアートセンターで小山・朴大成先生の展覧会を見たことがある。その展覧会は非常に強い印象を私に残した。そのとき私は、「いつか卒業したら、自分の絵を持って先生を訪ねたい」と思った。やがて卒業し、あちこち尋ね回って連絡先を見つけ、大学時代に描いた絵と書を書類にまとめて、朴大成先生を訪ねた。
小山先生のアトリエで、大学時代の作品を見ていただいた。先生の最初の言葉は、「絵はめちゃくちゃだが、字はよく学んでいるな」というものだった。そのとき見せた書は、顔真卿の《争座位帖》を臨書した作品だった。私のことが少し疑わしかったのか、その場で実際に書いてみるように言われたのを覚えている。ともかく、こうして朴大成先生の信頼を得ることができ、《芥子園画譜》を通して山水画の基礎を固めていくことになった。
それからどれほど時間が過ぎただろうか。あるとき突然、北宋の巨匠たちの運筆が見えるようになった。筆がどこから始まり、どのように結ばれているのかが感じ取れるようになったのである。ちょうどその頃、京畿道の坡州に月十万ウォンで作業室を貸してくれるという知人がいたため、私は大邱を離れ、縁もゆかりもない坡州へ移ることにした。自分で北宋絵画を四点ほど選び、本格的に制作に取り組んだ。筆画の軌跡を分析し、古い絵が成立する造形の仕組みを「解釈」することに集中した。まるで古代言語を分解して逐語訳するように、古画家の筆法を一つ一つ模倣し、体得していく作業を繰り返した。
創作の苦しみがどのようなものかは分からない。しかし模倣の苦しみは想像以上に大きかった。誰かに尋ねることもできず、教えを受ける環境でもなかった。すべてを自分一人で解決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また北の坡州の冬は南とは種類の違う寒さだった。一人用の電気マット以外に暖房器具はなく、まるで燃え盛る練炭の火さえ凍らせてしまいそうな寒さだった。それでも時間はゆっくりと流れていき、モクレンの花が満開になる頃、大学時代から目標としていた北宋絵画の最初の一枚が完成していた。それが《倣范寛 雪景寒林図》である。
その後も臨模の作業は続いた。北宋絵画だけでなく、中国南宋(倣李唐《万壑松風図》)、元、明、清、さらに朝鮮時代の絵画や陶磁、伝統文様、中国の画像磚など、東洋の古典美術を幅広く調べていった。
それが幼い頃の経験によるものなのか、それとも自分もいつか巨匠になりたいという欲望なのか、自分自身に課した目標への圧力なのか、何がここまで私を切実にさせているのかは、はっきりと言葉に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答えを見つけられない以上、自分の体が反応するままに任せるしかなかった。
三十代半ばになる頃、同年代の作家たちが画壇で活発に活動している姿を見ていたとき、ひとつ興味深い仕事が舞い込んできた。SBSのドラマ《師任堂、光の日記》である。当時、韓国を代表する俳優であるソン・スンホン氏とイ・ヨンエ氏が主演を務める、画家に関するドラマだった。画面に小道具として登場する絵画、手の代役、途中に挿入されるカットなど、思いがけず放送制作の仕事をすることになった。
仕事を引き受けた後、私は少し戸惑っていた。大邱でそれほど活動していない無名の作家である自分が、韓国トップクラスの俳優が出演するドラマ、それも美術に関するドラマに参加することになったからである。韓国・中国・日本で同時放送されるという記事が次々と出て、プレッシャーは次第に大きくなっていった。
制作チームとしても、私はまだ実績が証明されていない人物だったため、実際に描いた作品を見せてほしいと言われた。そこで2010年に制作した《倣安堅 夢遊桃源図》を車に積み、江南の制作会社の事務所へ持っていった。制作陣はその絵を見て、ようやく私を信頼してくれたようだった。最初に求められたのは、15世紀の画家・安堅が描いたと仮定された《金剛山図》であった。
しかし安堅の《金剛山図》は実在せず、彼が描いたという記録も残っていない。存在しない作品を、まるで実在するかのように創り出すことが目の前の課題となった。一度も訪れたことのない金剛山を「安堅風」で描かなければならない状況は、最初はかなり困難だった。確実な真作は《夢遊桃源図》のみであり、いくつかの伝称作品があるだけだった。ドラマの台本には北宋の画家・郭熙の名が登場するが、彼は実際に《夢遊桃源図》に影響を与えた画家である。つまり、《夢遊桃源図》、安堅の伝称作品、安堅に影響を与えた北宋の郭熙の作品、そしてインターネット上に散在する金剛山の画像を収集し、それらの交差点を探し出す作業を行った。21世紀に生きる人間が、15世紀の言語で詩を書くような作業だったと言えるだろう。そのおかげで「創作の苦しみ」とまでは言えないが、「編集の苦しみ」というものを骨身にしみて理解することができた。
もう一つ、ドラマの仕事で印象に残っている絵がある。ドラマのクライマックスを飾る絵で、男女の主人公(イ・ヨンエ、ソン・スンホン)が並んで座り、それぞれが絵を描き、CGで一つの画面に合成されるというシーンだった。クライマックスを飾る絵だと言われ、心理的な負担はさらに大きくなった。
まず、その時代に存在していそうな絵で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また金剛山で写生をする設定だったため、現場感のある筆線が必要だと感じた。師任堂が生きたのは1500年前後なので、その時代に近い画家たちの資料を調べた。韓国の絵画は観念山水が多いため、中国の絵画を参考にすることにした。全体の雰囲気は明代の空気を取り入れ、筆線の感覚は謙斎鄭敾を参考にし、岩や樹木の形態は自分が好む古代画家の作品から取り出して再構成した。一度も見たことのない金剛山を16世紀風の形式で描き、さらに二つの異なる絵が合わさったときに美しい構成を生み出さ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のは、決して容易な作業ではなかった。撮影が終わった後、この絵に《胸中山水》という題名を付けた。
ドラマ制作の過程では、語り尽くせないほど多くの出来事や紆余曲折があったが、約一年半にわたるプロジェクトを無事に終えることができた。有名俳優が出演するドラマ制作に参加したことで、画家として注目され、これから有名になるだろうと言ってくれる人もいた。しかし、ドラマの小道具として登場した絵によって作家として注目され、有名になるという話は、私にはどこか滑稽に思えた。メディアで作品が露出されたからといって、それが個人の制作成果を高めるわけではないだろう。ただ、これまで想像したこともなかった心理的な重圧と負担に耐え、「作家」としてではなくドラマ制作の「チームの一員」として役割を果たすことができたという点に満足している。その後もドラマやドキュメンタリー制作に関わる機会が続いた。もちろん、作家として必要な自由な造形の世界と無限の想像力のために、古典を読み続ける作業も変わらず続けてきた。
今振り返ってみても、二十代前半に書道を選んだことは本当に良い選択だったと思う。大学を卒業し、波乱に満ちた二十代後半の時期に、私はついに自分が望んでいた北宋山水を、自分なりに満足できる形で描き出すことができた。もちろん今になって振り返ると、技法的な面や制作過程には物足りなさも残る。しかし、どの道を通っても最終的に目的地に到達すればよいではないか。「昔の絵をただ写して何の意味があるのか」と皮肉を言われることも少なくなかった。しかし、昨日のものを模倣することと、千年前のものを模倣することは、本質的には同じことだと私は思っていた。同時代の美術、あるいは現代美術とは、今まさに起こっている現象であって、私が追いかける対象ではないと考えていた。重要なのは、新しいものを生み出すための力を自分自身の中で絶えず生産し続けられるかどうかである。そのためには、若いうちに経験のスペクトルを広げておく必要があると感じていた。そしてその経験を、私は古典の中に求めた。二十代前半、運命のように古典水墨画に惹かれ、自分が何から影響を受けるのかを自ら選んだだけである。千年、いやそれ以上の生命力を持つ先人たちの芸術作品を、ただ眺めるだけで通り過ぎてしまうのはあまりにも惜しいことだった。
よく「なぜ古典山水画の模写を始めたのか」と尋ねられる。そう聞かれるたびに、私は答えに困る。たいていは幼い頃の経験が大きく影響しているのだろうと答えるが、もしその経験がなかったとしても、果たして大きく違っていただろうか。それは分からない。
四十代半ばになった今、どのようにしてここまで流れてきたのかを明確に定義することはできないが、私は長いあいだ古典を読み続けてきた。2002年に書道を始め、2020年、郭熙の《寒林図》を最後に、自分で設定していた「古典の探読」を終えた。《寒林図》に印章を押したとき、「これで十分だ」という思いがふと湧き上がり、十八年間続いてきた一つの章が一瞬で終わった。ただ自然にその時期が来たのだろうか。それとも自分の良心がそれを許してくれたのだろうか。 まるで、「これからは自分の道を行け」と言われているかのようだった。
明末清初の画家、石涛(1642–1707)の『石涛画論』「変化章」には、次のような言葉がある。
「もし私の絵があの大画家たちの絵とそっくりだとしたら、それは彼らが食べ残した汁をすすっているにすぎない。それが私にとっていったい何の意味があるというのか。」
私も分かっている。それが残り汁であることは。しかし、その意味をどう与えるかは私自身にかかっている。私にとって古典とは、認識の道具であり、参照の基準であった。私はいつも考える。「模倣、変形、創造」という過程の中で、今自分はどこを歩いているのだろうか。そのことが、いつも気になっている。
2024年4月25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