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에 대하여
"동양회화, 혹은 한국화는 여백의 예술이다."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한 번쯤 들어본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이 오랫동안 지나치게 쉽게 사용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비어 있음, 침묵, 고요, 무위. 여백을 설명하는 언어들은 풍부하지만, 실제 화면 안에서 그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말해주는 언어는 드물다. 그 결과 수묵화의 많은 부분이 제대로 분석되지 않은 채 이 말 아래 방치되어 왔다.
나의 출발점은 단순한 물음이다. 여백이라 불리는 부분은 실제로 무엇인가.
여기서 내가 말하는 수묵화란 북송에서 조선 말기에 이르는 동아시아 전통 산수화 계열을 가리킨다. 본 글은 현대 한국화 전반이나 모든 동양회화를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오랫동안 관찰하고 학습해 온 전통 산수화의 화면 구조를 중심으로 여백 개념을 검토하려는 시도이다.
실제 그림을 들여다보면, 여백이라 불리는 영역이 결코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종이 위에 엷은 먹이 깔려 있기도 하고, 번짐이 스며 있기도 하며, 주변의 농담과 대비 속에서 밝기와 무게가 조율되기도 한다. 겉으로는 비어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 영역은 화면 전체의 거리감과 공간감, 균형을 떠받치는 데 직접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림의 특정 영역에서 추출한 표본 톤을 비교해 보면, 일반적으로 여백으로 인식되는 영역 역시 동일한 밝기나 상태로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농도와 명도 차이가 나타나며, 이러한 차이는 화면의 공간감과 시선의 흐름을 형성하는 조형 요소로 작동한다.
물론 오래된 작품이라는 특성상 산화와 오염, 촬영 환경에 따른 왜곡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러한 조건을 감안하더라도 화면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조직적인 명도 차이를 단순한 우연의 결과로 보기는 어렵다.
만약 그것이 단순한 바탕재의 원상 상태에 불과했다면 이처럼 반복적이고 구조적인 밀도 차이가 나타날 이유가 없다.
나는 이러한 차이가 화면의 공간감과 균형을 형성하기 위해 작가가 의도적으로 가한 조형적 개입의 결과라고 판단한다.
이를 바탕으로 나는 여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여백이란 화면을 형성하기 위한 바탕 작업이 완료된 이후, 조형 행위가 직접적으로 가해지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서 바탕 작업이란 종이의 염색, 포수, 배접, 바탕색 처리와 같이 화면 전체의 조건을 설정하기 위한 준비 과정을 의미한다. 이러한 행위는 화면의 토양을 만드는 작업이지, 특정 형상을 구성하거나 공간을 조직하기 위한 조형적 개입으로 보지 않는다.
이 구분이 자의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바탕색 처리도 결국 화면의 공간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바탕 작업은 화면 전체에 균일하게 작용하며, 특정 형태나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후에 펼쳐질 조형 행위의 전제 조건을 설정하는 일이다. 반면 선, 먹, 번짐이 화면의 특정 지점에서 농도의 차이를 만들어내고 거리감을 조직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다른 차원의 행위다. 나는 그 경계를 기준으로 여백과 비여백을 나눈다. 완벽하게 명료한 경계는 아니지만, 화면을 분석하는 데 있어 이 구분은 실질적으로 유효하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선, 먹, 번짐, 농담 등의 요소가 화면의 형태 형성이나 공간 조직에 관여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여백이 아니다. 그것은 화면의 일부로 작동하는 조형 요소다. 여백이란 물리적 개입의 부재가 아니라, 조형적 개입의 부재를 의미한다.
이 정의를 가지고 산수화 앞에 서면,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여백이라 부르는 많은 부분이 더 이상 여백으로 남지 않는다.
하늘처럼 보이는 밝은 영역에는 엷은 먹이 깔려 있고, 물처럼 보이는 부분에는 번짐이 스며 있으며, 안개처럼 읽히는 영역에는 주변과의 밀도 차이가 작동하고 있다. 하늘의 밝기가 조금만 달라져도 거리감이 무너지고, 물 부분의 농도가 달라지면 공간이 사라지며, 안개의 처리 방식이 흔들리면 전체 화면의 깊이와 긴장이 무너진다. 이 부분들은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 공백이 아니라, 아주 약한 방식으로 화면을 결정하는 구조의 일부다.
밝은 부분도 마찬가지다. 수묵화는 흰색 안료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밝음을 표현하는 방식은 종이를 남기는 행위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종이를 남겼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여백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밝은 형태는 주변의 어두운 값에 의해 떠오르고, 주변의 먹층이 눌러줌으로써 비로소 형태를 얻는다. 그 밝음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형성된 구조다.
그림의 특정 영역에서 추출한 표본 톤 비교를 했을 때, 일반적으로 여백으로 인식되는 운무와 하늘의 영역 역시
동일한 상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명도와 농도를 보인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공간의 깊이와 거리감을 형성하는 조형 요소로 작동한다.
여백이라는 말은 때로는 화면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분석을 멈추게 만드는 지점이 되기도 한다. 구조를 이루는 미세한 차이들이 충분히 읽히지 못할 때, 그 모든 것이 여백이라는 하나의 말로 묶여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문제 삼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나는 여백이라는 말을 완전히 버리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조형 행위가 직접적으로 가해지지 않은 상태, 그 엄격한 의미에서의 여백은 개념으로서 유효하다. 실제 작품 가운데 그러한 영역이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사례는 생각보다 드물며, 내가 관찰해 온 전통 산수화의 많은 화면에서 여백이라 불리는 부분은 이미 공간 형성과 균형에 관여하는 조형 요소로 작동하고 있다.
그림의 특정 영역에서 추출한 표본 톤을 비교해 보면, 일반적으로 여백으로 인식되는 하늘, 운무, 수면의 영역 역시 동일한 상태로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화면의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밀도와 명도 차이가 나타나며, 이러한 차이는 산세의 전후 관계와 공간의 깊이를 형성하는 조형적 장치로 작동한다.
따라서 이 영역들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화면 구조를 조직하는 조형 요소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여백의 언어로는 포착되지 않는 이 영역들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 나는 그것을 구조라는 말로 부르고자 한다. 여기서 구조란 화면을 형성하는 모든 요소들 사이의 관계, 즉 강하게 그어진 선과 희미하게 깔린 먹, 거의 보이지 않는 번짐과 남겨진 밝은 종이가 함께 만들어내는 깊이와 공간과 긴장의 체계를 가리킨다. 여백이 개입의 부재를 기준으로 한 소극적 개념이라면, 구조는 개입의 강도와 방향과 관계를 기준으로 한 적극적 개념이다. 이 둘은 대립하지 않는다. 여백은 구조의 한 극단, 즉 개입이 가장 적은 지점일 뿐이다.
예찬의 산수화는 내가 정의하는 '여백'의 대표적 사례에 가깝다.
이 작품에서 밝게 남겨진 공간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강과 공기, 거리와 깊이를 형성하는 적극적인 조형 요소로 작동한다.
산과 나무, 암석은 공간의 경계를 설정하기 위한 최소한의 구조물로 기능하며, 화면의 중심은 대상이 아니라 그 사이에 형성된 공간 자체에 놓여 있다.
내가 보는 화면은 여백과 형태로 나뉘지 않는다. 강하게 그어진 선도, 희미하게 깔린 먹도, 거의 보이지 않는 번짐도, 남겨진 밝은 종이도 모두 같은 수준에서 화면을 형성한다. 차이가 있다면 단지 개입의 강도와 역할뿐이다.
수묵화는 비움의 예술이기 이전에, 아주 미세한 차이들을 통해 깊이와 공간을 형성하는 예술이다.
따라서 내가 다루는 것은 여백이 아니라 구조다. 그 구조를 이해하는 순간, 우리가 오랫동안 여백이라고 불러온 많은 부분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부유의 산수화 역시 내가 정의하는 '여백'의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화면 중앙의 밝은 공간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강물과 공기, 절벽 사이의 거리감을 형성하는 조형 요소로 작동한다.
절벽과 수목, 건축물, 선박은 공간을 둘러싸고 규정하는 경계 역할을 하며, 화면의 중심은 물질적 대상보다 그 사이에 형성된 공간에 놓여 있다.
2026. 5.
On Yeobaek
East Asian painting is often said to be defined by what is left unpainted — by yeobaek (negative space). Even those with little interest in art have heard this idea at least once.
But I believe this idea has been used too casually for too long. Emptiness, silence, stillness, non-action. The language used to describe yeobaek is rich, yet language that explains concretely what it is and how it functions within an actual picture plane is rare. As a result, much of ink painting has been left unexamined, hidden beneath this single idea.
My starting point is a simple question: What actually is the area called yeobaek?
The ink painting I refer to here belongs to the tradition of East Asian landscape painting from the Northern Song dynasty through the late Joseon period. This essay is not an attempt to address contemporary Korean painting as a whole, nor all of East Asian painting. It is an examination of the concept of yeobaek focused on the pictorial structure of traditional landscape painting — a body of work I have spent a long time observing and studying.
When you look closely at actual paintings, you find that the areas called yeobaek never exist in a state of pure nothingness. A thin layer of ink may be spread across the paper. Bleeding may have seeped through. Brightness and weight may be calibrated within the surrounding gradations of tone and contrast. Even where the surface appears empty, those areas are directly involved in sustaining the sense of distance, spatial depth, and balance across the entire picture plane.
When tone samples extracted from specific areas of the painting are compared, it becomes clear that even the areas generally perceived as yeobaek do not exist at a uniform brightness or in a uniform state.
Different densities and tonal values appear depending on location, and these differences function as pictorial elements that construct spatial depth and guide the movement of the eye.
Of course, as an aged work, some distortion due to oxidation, contamination, and photographic conditions must be acknowledged.
However, even accounting for those factors, it is difficult to regard the systematic tonal variations distributed across the picture plane as the result of mere chance.
If these areas were simply the unaltered ground of the support material, there would be no reason for such repeated and structurally organized differences in density to appear.
I conclude that these variations are the result of deliberate pictorial intervention by the artist, made with the intention of constructing spatial depth and balance within the picture plane.
On the basis of this, I define yeobaek as follows. Yeobaek refers to the state in which, after the preparatory groundwork for forming the picture plane has been completed, no direct pictorial act has been applied. By preparatory groundwork I mean processes such as dyeing, sizing, backing, and ground color treatment — preparatory procedures that establish the overall conditions of the picture plane. These actions set the uniform conditions across the entire surface. They are not pictorial interventions made to construct specific forms or organize space.
This distinction may appear arbitrary, and I acknowledge that. Does not ground color treatment ultimately affect the spatial quality of the picture plane?
My thinking is this. Preparatory groundwork acts uniformly across the entire surface and is not intended to produce specific forms or spaces. It establishes the preconditions for the pictorial acts that follow. The moment a line, ink, or bleeding creates a difference in density at a specific point on the surface and begins to organize a sense of distance, that is already an act of a different order. I draw the boundary between yeobaek and non-yeobaek at that line. It is not a perfectly clear boundary, but I find this distinction practically valid for the analysis of the picture plane.
Therefore, the moment elements such as line, ink, bleeding, or tonal gradation become involved in forming shapes or organizing space, they are no longer yeobaek. They are pictorial elements functioning as part of the picture plane. Yeobaek means not the absence of physical intervention, but the absence of pictorial intervention.
Standing before a landscape painting with this definition, something interesting happens. Much of what we ordinarily call yeobaek no longer remains yeobaek.
The bright areas that read as sky carry a thin layer of ink. The areas that read as water have bleeding soaked through them. The areas that read as mist operate through a difference in density relative to their surroundings. If the brightness of the sky shifts even slightly, the sense of distance collapses. If the density of the water changes, the space disappears. If the handling of the mist wavers, the depth and tension of the entire picture plane breaks down. These areas are not voids playing no role. They are part of a structure that determines the picture plane in very subtle ways.
The bright areas are no different. Ink painting does not make active use of white pigment. As a result, expressing brightness is close to the act of leaving the paper bare. But leaving the paper bare does not automatically make something yeobaek. A bright form rises by way of the darker values surrounding it, and only gains its form when the surrounding layers of ink press it down. That brightness does not stand on its own — it cannot exist apart from its surrounding relationships.
When tone samples extracted from specific areas of the painting are compared, it becomes clear that even the areas of mist and sky generally perceived as yeobaek do not exist in a uniform state.
Different tonal values and densities appear depending on location.
These differences function not as simple voids but as pictorial elements that construct spatial depth and a sense of distance.
The word yeobaek can sometimes serve as a starting point for understanding a picture plane, but it can equally become the point at which further analysis stops. When the subtle differences that constitute structure are not read with sufficient care, all of it gets bundled together under this single word. That is precisely what I take issue with.
I am not arguing that the word yeobaek should be abandoned entirely. As a concept, yeobaek in its strict sense — the state in which no direct pictorial act has been applied — remains valid. Such areas do exist in certain works. But those cases are rarer than one might expect. In many of the traditional landscape paintings I have observed, the areas called yeobaek are already functioning as pictorial elements involved in forming space and maintaining balance.
When tone samples extracted from specific areas of the painting are compared, it becomes clear that even the areas of sky, mist, and water surface generally perceived as yeobaek do not exist in a uniform state.
Different densities and tonal values appear depending on location within the picture plane.
These differences function as pictorial devices that construct the spatial relationships between the mountain forms and the depth of space.
The areas can therefore be understood not as simple voids but as pictorial elements that organize the structure of the picture plane.
Then how should we name the areas that the language of yeobaek cannot capture?
I propose to call them structure.
By structure I mean the relationships among all the elements that form the picture plane — the way strongly drawn lines, faintly laid ink, nearly invisible bleeding, and bare paper left behind together produce depth and space. If yeobaek is a passive concept defined by the absence of intervention, structure is an active concept defined by the intensity, direction, and relationship of interventions. The two are not opposites. Yeobaek is simply one extreme of structure — the point where intervention is least.
Ni Zan's landscape painting comes close to what I would consider a representative example of yeobaek as I define it.
In this work, the bright areas left bare are not simple voids. They function as active pictorial elements that form the river, the air, and a sense of distance and depth.
The mountains, trees, and rocks serve as minimal structures that define the boundaries of space. The center of the picture plane lies not in the depicted objects but in the space formed between them.
The picture plane I see is not divided into yeobaek and form. Strongly drawn lines, faintly spread ink, nearly invisible bleeding, bare paper left behind — all of these operate at the same level to form the picture plane. The only difference is in the intensity and role of the intervention.
Ink painting is an art that constructs depth and space through very subtle differences in density.
What I am dealing with is therefore not yeobaek but structure. The moment that structure is understood, much of what we have long called yeobaek begins to look entirely different.
Pu Ru's landscape painting can likewise be regarded as a representative example of what I define as 'yeobaek'.
In this work, the bright space at the center of the picture plane is not a simple void. It functions as a pictorial element that constructs the river, the air, and the sense of distance between the cliffs.
The cliffs, trees, architecture, and boats serve as boundaries that enclose and define the space. The center of the picture plane lies not in material objects but in the space formed between them.
May 2026
论余白
东亚绘画,常被认为是由余白(Yeobaek)所定义的艺术。即便是对艺术不甚关注的人,也至少听过这种说法一次。
然而我认为,这一观念长期以来被过于随意地接受和使用。空无、沉默、静寂、无为。用于描述余白的语言十分丰富,然而能够具体说明它在实际画面中究竟是什么、如何运作的语言却极为匮乏。结果是,水墨画的许多部分在未经充分分析的情况下,就被这一说法所掩盖。
我的出发点是一个简单的问题:被称为余白的部分,究竟是什么?
我在此所说的水墨画,是指从中国北宋至朝鲜末期的东亚传统山水画系列。本文并非试图涵盖当代韩国画的整体,也不涉及所有东亚绘画,而是以我长期观察和研究的传统山水画的画面结构为中心,对余白概念进行重新审视。
仔细观察实际的绘画作品,便会发现,被称为余白的区域从未以纯粹的虚无状态存在。纸面上可能铺有一层淡墨,渗染可能已悄然浸入,明度与分量也可能在周围浓淡与对比的关系中被细心调节。即便表面看起来是空的,这些区域也在直接支撑着整个画面的距离感、空间感与均衡。
对画面特定区域提取的色调样本进行比较后可以发现,即便是通常被认为是余白的区域,也并非以均匀的亮度或统一的状态存在。
不同位置呈现出不同的墨色密度与明度差异,这些差异作为构建空间深度、引导视线流动的造型要素而发挥作用。
当然,作为年代久远的作品,因氧化、污染及拍摄条件所带来的色差失真是客观存在的。
然而,即便考虑到这些因素,也难以将画面中普遍出现的系统性明度差异归结为单纯的偶然。
若这些区域仅仅是底材的原始状态,便不应出现如此反复且具有结构性的密度差异。
我认为,这些差异是画家为构建画面空间感与均衡而有意施加的造型干预的结果。
基于此,我对余白作如下定义。余白,是指在用于形成画面的底层准备工作完成之后,未被直接施加任何造型行为的状态。所谓底层准备工作,是指染纸、上矾、裱背、底色处理等为设定画面整体条件而进行的预备过程。这些行为在整个画面上均匀地发挥作用,并非为构成特定形象或组织空间而进行的造型介入。
这一区分或许看起来带有主观性,我对此并不回避。底色处理难道不也会影响画面的空间感吗?
我的想法是这样的。底层准备工作均匀地作用于整个画面,并非为了产生特定的形态或空间。它是为后续造型行为设定前提条件的工作。而当线条、墨色、渗染在画面的特定位置制造出密度差异、开始组织距离感的那一刻,便已是另一个层次的行为。我以此为界,划分余白与非余白。这并非一条完全清晰的边界,但我认为,这一区分在分析画面时具有切实的有效性。
因此,当线条、墨色、渗染、浓淡等要素介入形态构成或空间组织的瞬间,它们便不再是余白,而是作为画面一部分运作的造型要素。余白意味着的,不是物理介入的缺席,而是造型介入的缺席。
以这一定义来审视山水画,便会发生一件有意思的事情。我们通常所说的余白,有许多部分将不再是余白。
那些被读作天空的明亮区域,铺有一层薄薄的淡墨;那些被读作水面的部分,渗染已悄然浸入;那些被读作云雾的区域,与周围的密度差异在其中运作。天空的亮度稍有变化,距离感便随之崩溃;水面的浓度一旦改变,空间便消失不见;云雾的处理方式若有所动摇,整个画面的深度与张力便会瓦解。这些部分并非毫无作用的空白,而是以极为微弱的方式决定着画面的结构的一部分。
明亮的部分同样如此。水墨画并不积极使用白色颜料。因此,表现明亮的方式近乎于留下纸面的行为。然而,留下纸面并不意味着那里就自动成为余白。明亮的形态因周围较暗的色值而浮现,只有在周围的墨层将其压实之后,才得以获得形态。那种明亮并非独立存在——它离开了周围的关系便无法成立。
对画面特定区域提取的色调样本进行比较后可以发现,即便是通常被认为是余白的云雾与天空区域,也并非以均匀的状态存在。
不同位置呈现出不同的明度与墨色密度。
这些差异并非单纯的空白,而是作为构建空间深度与距离感的造型要素而发挥作用。
余白这个词,有时可以成为理解画面的出发点,但同时也可能成为令进一步分析就此停止的节点。当构成结构的微细差异未能被充分读取时,所有这一切便被归并在这一个词之下。我所质疑的,正是这一点。
我并非主张彻底抛弃余白这个词。在严格意义上——即未被直接施加任何造型行为的状态——余白作为一个概念仍然有效。在某些作品中,确实存在这样的区域。然而,这类案例比人们通常以为的要少得多。在我所观察的许多传统山水画画面中,被称为余白的部分,已然作为参与空间构成与均衡维持的造型要素在运作。
对画面特定区域提取的色调样本进行比较后可以发现,即便是通常被认为是余白的天空、云雾与水面区域,也并非以均匀的状态存在。
不同位置呈现出不同的密度与明度差异。
这些差异作为构建山势前后关系与空间深度的造型装置而发挥作用。
因此,这些区域不应被理解为单纯的空白,而应被视为组织画面结构的造型要素。
那么,对于那些余白的语言所无法捕捉的区域,我们应当如何称呼?
我提议将其称为结构。
所谓结构,是指形成画面的所有要素之间的关系——有力勾勒的线条、淡淡铺陈的墨色、几乎不可见的渗染,以及留下的白纸,共同生成深度与空间的方式。若余白是以介入之缺席为基准的消极概念,那么结构便是以介入的强度、方向与关系为基准的积极概念。两者并不对立。余白不过是结构的一个极端——介入最少的那个点。
倪瓒的山水画,接近于我所定义的余白的典型案例。
在这件作品中,明亮留白的空间并非单纯的空白,而是作为积极的造型要素,形成了江水、空气以及距离感与深度。
山峦、树木与岩石作为界定空间边界的最小结构物而发挥功能,画面的中心不在于所描绘的对象,而在于其间所形成的空间本身。
我所看到的画面,并不分为余白与形态。有力勾勒的线条、淡淡铺陈的墨色、几乎不可见的渗染、留下的白纸——所有这些都在同一层次上形成画面。若有差异,不过是介入的强度与作用的不同。
水墨画是一门通过极为微细的密度差异构建深度与空间的艺术。
因此,我所处理的不是余白,而是结构。一旦理解了这一结构,我们长久以来所称为余白的许多部分,便会以截然不同的面貌重新呈现在眼前。
溥儒的山水画,同样可视为我所定义的“留白”的代表性案例之一。
在这件作品中,画面中央的明亮空间并非单纯的空白,而是作为构建江水、空气以及峭壁之间距离感的造型要素而发挥作用。
峭壁、树木、建筑与船只作为围合并界定空间的边界而发挥功能,画面的中心不在于物质性的对象,而在于其间所形成的空间。
2026年5月
余白について
東アジアの絵画は、描かれなかったものによって定義される芸術だとよく言われる——すなわち余白(負の空間)によって。美術にさほど関心のない人でも、一度はこの言葉を耳にしたことがあるだろう。
しかし私は、この考え方があまりにも長い間、無批判に受け入れられてきたと思っている。空虚、沈黙、静寂、無為。余白を説明する言葉は豊富だが、実際の画面の中でそれが何であり、どのように機能しているかを具体的に語る言葉は乏しい。その結果、水墨画の多くの部分が十分に分析されないまま、この一語の下に放置されてきた。
私の出発点は単純な問いである。余白と呼ばれる部分は、実際には何なのか。
ここで私が言う水墨画とは、中国北宋から朝鮮末期に至る東アジア伝統山水画の系譜を指す。本稿は現代韓国画の全体を対象とするものでも、東アジア絵画のすべてを論じるものでもない。私が長年観察し学んできた伝統山水画の画面構造を中心に、余白という概念を検討する試みである。
実際の絵画を仔細に見ると、余白と呼ばれる領域が決して純粋な無の状態として存在していないことに気づく。紙の上に薄い墨が引かれていることもあり、にじみが染み込んでいることもあり、周囲の濃淡と対比の中で明るさと重さが調整されていることもある。表面上は空いているように見えても、それらの領域は画面全体の距離感、空間感、均衡を直接支えている。
画面の特定の領域から抽出したトーンサンプルを比較すると、一般に余白として認識される領域もまた、均一な明るさや状態で存在しているわけではないことが確認できる。
位置によって異なる密度と明度の差異が現れており、こうした差異は空間の奥行きを構築し、視線の流れを導く造形的要素として機能している。
もちろん、年代を経た作品である以上、酸化・汚染・撮影環境による歪みが存在することは認めなければならない。
しかし、そうした条件を考慮したとしても、画面全体にわたって現れる系統的な明度の差異を、単なる偶然の結果として見ることは難しい。
もしこれらの領域が単に支持体の素地のままであれば、このように反復的かつ構造的な密度の差異が現れる理由がない。
私はこれらの差異を、画面の空間感と均衡を構築するために画家が意図的に加えた造形的介入の結果であると判断する。
以上を踏まえて、私は余白を次のように定義する。余白とは、画面を形成するための下地作業が完了した後、造形行為が直接加えられていない状態を指す。ここで下地作業とは、紙の染色、礬水引き、裏打ち、地色処理など、画面全体の条件を設定するための準備過程を意味する。これらの行為は画面全体に均一に作用するものであり、特定の形象を構成したり空間を組織したりするための造形的介入とは見なさない。
この区別が恣意的に見えることは承知している。地色処理もまた、結局は画面の空間感に影響を与えるのではないか。
私の考えはこうである。下地作業は画面全体に均一に作用するものであり、特定の形態や空間を生み出すためのものではない。それは後に展開される造形行為の前提条件を設定する作業である。一方、線・墨・にじみが画面の特定の地点で密度の差異を生み出し、距離感を組織し始めた瞬間、それはすでに別次元の行為だ。私はその境界を基準に、余白と非余白を分ける。完全に明確な境界ではないが、画面を分析するうえでこの区別は実質的に有効だと判断する。
したがって、線・墨・にじみ・濃淡などの要素が形態の形成や空間の組織に関与した瞬間、それはもはや余白ではない。それは画面の一部として機能する造形要素である。余白とは物理的介入の不在ではなく、造形的介入の不在を意味する。
この定義をもって山水画の前に立つと、興味深いことが起きる。私たちが一般に余白と呼んでいる多くの部分が、もはや余白として留まらなくなる。
空として読まれる明るい領域には薄い墨が引かれており、水として読まれる部分にはにじみが染み込んでおり、霞として読まれる領域には周囲との密度の差異が働いている。空の明るさがほんの少し変わるだけで距離感が崩れ、水の部分の濃度が変われば空間が消え、霞の処理が揺らげば画面全体の奥行きと緊張が失われる。これらの部分は何の役割も果たさない空白ではなく、ごく微弱な形で画面を決定している構造の一部である。
明るい部分も同様である。水墨画は白い顔料を積極的には使用しない。そのため、明るさを表現する方法は、紙を残す行為に近い。しかし、紙を残したからといって、それが直ちに余白になるわけではない。明るい形は周囲の暗い値によって浮かび上がり、周囲の墨層が押さえることで初めて形を得る。その明るさは単独では成立しない——周囲との関係なしには存在し得ないのである。
画面の特定の領域から抽出したトーンサンプルを比較すると、一般に余白として認識される雲霞と空の領域もまた、均一な状態で存在しているわけではないことが確認できる。
位置によって異なる明度と密度が現れている。
こうした差異は単純な空白としてではなく、空間の奥行きと距離感を構築する造形的要素として機能している。
余白という言葉は、画面を理解するための出発点となることもあるが、同時にそれ以上の分析を止めてしまう地点にもなりうる。構造を成す微細な差異が十分に読み取られないとき、そのすべてがこの一語にまとめられてしまうからだ。私が問題にしているのは、まさにその点である。
余白という言葉を完全に捨てるべきだと主張したいわけではない。造形行為が直接加えられていない状態という厳密な意味での余白は、概念として有効である。実際の作品の中にそうした領域が存在する場合もある。しかしそのような事例は思いのほか少なく、私が観察してきた伝統山水画の多くの画面において、余白と呼ばれる部分はすでに空間形成と均衡に関与する造形要素として機能している。
画面の特定の領域から抽出したトーンサンプルを比較すると、一般に余白として認識される空・雲霞・水面の領域もまた、均一な状態で存在しているわけではないことが確認できる。
画面内の位置によって異なる密度と明度の差異が現れている。
こうした差異は、山の形態の前後関係と空間の奥行きを構築する造形的装置として機能している。
したがってこれらの領域は、単純な空白としてではなく、画面構造を組織する造形要素として理解されうる。
では、余白の言語では捉えられないこれらの領域を、何と呼ぶべきか。
私はそれを構造と呼ぶことを提案する。
ここで構造とは、画面を形成するすべての要素間の関係を指す——力強く引かれた線、ほのかに引かれた墨、ほとんど見えないにじみ、残された白い紙が、ともに奥行きと空間を生み出す様式である。余白が介入の不在を基準とした消極的概念であるとすれば、構造は介入の強度・方向・関係を基準とした積極的概念である。両者は対立しない。余白は構造の一極端——介入が最も少ない地点——にすぎない。
倪瓚の山水画は、私が定義する余白の代表的な事例に近い。
この作品において、明るく残された空間は単純な空白ではなく、川・空気・距離感と奥行きを形成する積極的な造形要素として機能している。
山・樹木・岩は空間の境界を定める最小限の構造物として機能しており、画面の中心は描かれた対象ではなく、その間に形成された空間そのものにある。
私が見る画面は余白と形態に分かれていない。力強く引かれた線も、ほのかに引かれた墨も、ほとんど見えないにじみも、残された白い紙も、すべて同じ次元で画面を形成している。差異があるとすれば、介入の強度と役割だけである。
水墨画は、ごく微細な密度の差異を通じて奥行きと空間を構築する芸術である。
したがって私が扱うのは余白ではなく構造である。その構造を理解した瞬間、私たちが長らく余白と呼んできた多くの部分は、まったく異なる姿で見え始める。
溥儒の山水画も、私が定義する「余白」の代表的な事例の一つとして見ることができる。
この作品において、画面中央の明るい空間は単純な空白ではなく、川・空気・絶壁の間の距離感を形成する造形要素として機能している。
絶壁・樹木・建築物・船は空間を囲み規定する境界として機能しており、画面の中心は物質的な対象よりもその間に形成された空間にある。
2026年5月